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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단상

거주하기- 존재하기- 건축하기

by 夢人 mooksu mooksu 2012. 8. 21.



우리는 바로 지금,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풀어말하면, 매일매일 집에서나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 입고, 아침을 먹고, 일터로 나간다. 돌아와서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씻고, 잔다. 일터에서는 일을 한다. 거주한다는 것은 꼭 집만을 국한하는 의미가 아니다. 일터, 심지어 오락을 즐기는 곳도 크게는 거주한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즉 거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상생활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일찍이 하이데거는 '거주한다는 의미는 즉 존재한다는 의미'임을 지적하였다. 


거주, 일, 오락, 만남, 휴식 등의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는 언제나 공간적인 곳에서 함께 벌어진다. 다시말하면,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 일상생활의 배경이며, 동시에 일상생활 자체인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간에 관심이 많다. 자신이 머무는 집을 직접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춰 가꾸거나, 커피한잔의 즐거움을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곳에서 즐긴다든가, 이왕이면 잘 꾸며진 업무공간에서 근무를 하고 싶어한다든가 등등, 언제나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욕구를 공간적으로 함께 동일화하려 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삶의 행태에 대해서,  메를로 퐁티는 '지각이란 우리의 몸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방식'이며, 나아가 '공간이란 인간의 몸이 세계와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나아가 '인간의 몸이 경험적 세계의 중심'이라는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신념은 근대건축 이후에 지적되고 있는 '장소의 상실은 곧 존재의 상실, 자아의 상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여주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와 판단을 생각해보면, 전술한 이야기가 어떤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곳을 먼저 재산가치의 증식으로 바라본다. 거주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아파트에 매달려 있다. 혹자는 아파트는 편리하고, 안전하고, 거주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러한 아파트에 대한 인식조차 성장위주의 개발, 급성장에 대한 '모든 시간의 희생'의 과정속에서 변화하여진 태도인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침일찍 일어나자 마자 대부분의 직장인이 하루 삶의 대부분을 송두리째 일로서 매진해야되었던 우리는, 당연히 삶 자체가 일에 대한 최대한의 시간투자와 능률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처럼 지극히 기능적이고, 지극히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잠만 자는 벌집상자'의 생활에 익숙해왔기에, 이제 거주성을 평가하는 우리시대의 잣대도 그렇게 변질되었다고 생각된다. 전세계의 대부분의 나라, 특히 선진국에는 이러한 지극히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잠자는 벌집상자'가 많지 않은가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주거문화 현상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또한, 어느나라이건 집장사를 매개로 생계를 이끌어 가는 집단이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한 이치이고, 그렇게 사는 집단 또한 당연히 존중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그래서 어떤 집을 지었느냐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여전히 아직도 대한민국은 수익형 주거부동산의 제일 원칙은 최대용적률과 최대한의 방 갯수이다. 그래서, 지하방이 나오게 되었고, 발코니 편법증축(지금은 합법화 했지만), 최대 건폐율 찾아먹기 등의 현상이 벌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임대료 X 방 갯수가 수익이다. 또한 공사비를 최대한 적게 들여야 한다. 그것 또한 수익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곳이 학생들이 머물 방이니깐, 학교에서 열공하고 온 학생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겠다'라는 건립취지는 현실을 모르는 놈, 미친놈 취급을 받아왔다. '음... 나도 이 일로 돈을 벌고, 그리고 이 곳에 머무는 사람에게도 편안함을 선사해주고...'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식,  '나도 좋고, 너도 좋은' 즉, '우리'가 서로 좋을 수 있는 가치와 살아가는 태도가 무너져갔던 것이다. 


국가를 이끌고 있는 정부는 어떠하였는가.  경제성장과 더불어 도시로 밀려오는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한 그 당시 최선의 이러한 정책결정이 처음에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시행되다가, 그것도 '학습효과'라고, 대규모 단지 개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무원들과 이해당사자들이 이 일에 몰두하였는가. 그 당시 건설공무원이, 건설사 임직원이, 건설사 현장소장이, 심지어 공사현장 감리까지 얼마나 해쳐먹었는 지는 공공연한 불편한 진실이잖는가. 우리나라만큼 대형 건설사가 많은 나라도 없고, 그런 건설사들의 직발주 공사인력의 보유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나라도 없다.  건축설계사는 어떠하였는가. '평당 공사비'의 불편한 진실은 과거 물량위주의 설계관행에서 이득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않는가. 노동력, 노동시간의 투입 대비 설계용역을 받은 것이 아니라, 평당 얼마라는 용역비 관행이 설계사무소의 폭리를 정당화했다는 건, 자유로울 수 없는 내게도 불편한 진실이다. 그 당시 똑같은 걸 찍어내다시피 한 아파트 설계, 별로 시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아파트 설계는 말 그대로 그냥 돈을 쓸어 담는 거였다고 한다.  물론 그 댓가는 지금 시점에서 참혹하다.  건축설계나 건설계에 대한 사회적 불신 뿐만 아니라, '평당 설계비'의 저주가 거꾸로 건축설계업계를 적자와 파산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처럼 벌어지고 있는 전술한 현상들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우리가, 머무는 공간을 내 삶과는 다른 별개로서 즉, 객체화된 공간으로 대상화하게 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병리적 현상은 그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다층적이다. 그렇지만, 건축가로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아내랑 섹스를 할 수 있어? 가족이잖아~'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이, 현재의 아파트라는 공간구성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것이고, 나아가 이혼율, 범죄율, 자녀와의 거리감, 이웃과의 소통 부족 등이 결국 우리가 우리를 담는 이 공간에 대한 태도에서 일정부분 기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겐, 거주한다는 의미는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건축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간은 내 몸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공간을, 내 일상에서 삶 자체인 그 공간을, 개념화하고 대상화하면서, 삶 자체의 일부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본다. 즉, 존재의 상실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이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라는 걸 아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자신과 관계맺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관계에 대한 긍정과 대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바꾸기 시작한다는 걸 또다시 알게 된다.(건축주가 자신의 집에 애정을 갖고 집을 짓고 가꾸면서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건축주 중의 다수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자신이 집을 짓고 가꾸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었다.) 


학로는 내 삶의 한 부분이다. 물론 통상적인 '대학로'와 내 삶의 공간으로서의 '대학로'의 물리적 경계와 생활의 범위는 다르다. 이 곳에서 20년을 있다보니, 어느새 대학로는 내 삶의 한 부분이 된것이다.


들뢰즈의 통찰, 즉 '모든 존재는 개념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고, 그 존재의 잠재된 다양성은 관습과 개념, 표상의 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는 말을 되새겨보자.   그 무한한 잠재성은 결국 관계적인 상황속에서 드러나는데, 그 관계성은 표상, 개념의 세계가 아닌 현재 자기가 머물고 살아가는 공간인 이곳에서 항상 벌어지고 있다. 이 평범한 의미를 자각하고 스스로 그 관계의 지평을 넓혀갈 때,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에게 삶의 의미로서, 삶의 즐거움으로서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이 건축의 의미이며, 내가 건축을 하는 이유이다. 건축은 내게, 하이데거의 통찰처럼, 건축한다는 것과 거주한다는 것, 그리고 존재한다는 것이 같은 의미임을 오랜시간 후에 알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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